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사레 보르자 (문단 편집) ==== 1497년 이후 ==== 이후 체사레는 [[나폴리]]의 왕으로 즉위하는 페데리코 4세[*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때 나폴리 왕이었던 페르디난도 2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으므로, 삼촌인 페데리코가 뒤를 이었다.]의 대관식을 집전하기 위해 [[나폴리]]로 갔으나 그 이면은 보르자 가문의 이익을 더 얻기 위한 것이였기도 했다. 그리고 [[로마]]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체사레는 환속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, 아버지인 [[알렉산데르 6세]] 또한 아들의 세속 영지와 아내감을 구할 겸 동맹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. 처음에는 [[나폴리]] 왕 페데리고의 딸 카를로타와 결혼하려는 시도를 보였으나, [[나폴리]]의 국왕이었던 페데리고는 왕가의 적녀와 교황의 사생아 간의 결혼을 탐탁치 않게 여겨 대신 가문의 서출 중 하나였던 알폰소에게 비셸리에 공작위를 주고 체사레의 동생이었던 [[루크레치아 보르자]]와 결혼하게 했고, 보르자 가문은 [[루크레치아 보르자]]의 재혼 외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. 이에 보르자 가문은 [[나폴리]]와 그 뒤에 있던 아라곤 왕가와 결별, 당시 [[스페인]]과 대립 중이던 [[프랑스]]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. [[샤를 8세]]의 [[이탈리아]] 원정이 실패된 이후 [[알렉산데르 6세]]는 후안 보르지아가 암살되기 3개월 전 [[샤를 8세]]에게 우호사절을 보내 관계 개선을 꾀했으나 샤를 8세가 4월 7일 앙부아즈 성에서 사고를 당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계획이 틀어질 위기에 처하게 된다. 하지만 [[샤를 8세]]의 사망은 [[알렉산데르 6세]]에게 호기로 작용했고, 조모의 집안인 비스콘티가와의 혈연을 내세워 [[밀라노]] 지역을 노리고 있으며 불임이던 아내 '잔 드 프랑스'와 자신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막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[[샤를 8세]]의 미망인 [[안 드 브르타뉴]]와 재혼을 원하던 [[프랑스]]의 새 국왕 [[루이 12세]]와 교섭했으며, [[루이 12세]]는 [[교황]]이 원하는대로 체사레의 환속을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.[* 전문은 대략 이렇게 된다. 첫째, 체사레에게 [[프랑스]]의 영토인 발랑스와 두아즈를 수여해 발랑스 공작위를 수여하는 동시에 금화 2만 프랑을 지급, / 둘째, 체사레를 창기병 100기의 지휘관으로 임명, [[이탈리아]]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운용 가능하고 비용은 [[프랑스]] 국왕이 부담하며, 왕의 선택에 따라 2, 300기를 증원하는 것과 최대 2천 기 규모로 확대할 수 있다. / 셋째, 체사레는 국왕으로부터 매년 금화 2만 프랑의 개인 보조금을 받음, / 넷째, [[밀라노]]를 정복할 시 체사레에게 아스티를 봉토로 수여, / 다섯째, 체사레에게 성 미카엘 기사단 훈위를 수여함. 이 정도면 그야말로 횡재한 것이었다.] 그리고 1498년 8월 17일 체사레는 [[추기경]]단에서 [[추기경]]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고, 곧 [[루이 12세]]의 특허장을 가지고 [[로마]]에 도착한 [[프랑스]] 사절로 통해 발랑스 공작이 된다.[* 역대 추기경 가운데, 스스로 사임한 것은 체사레가 처음이었다. 덧붙여 이때를 계기로 체사레는 동시대의 사람들로부터 발렌티노 공이라고 불리게 되는데, 바로 발랑스 공작과 그가 [[대주교]]로 있었던 발렌시아가 [[이탈리아어]]로는 같은 발렌티노로 불려졌기 때문이었다.] 1498년 10월 체사레는 자신의 심복들과 함께 [[로마]]를 떠나 [[프랑스]]로 향했다. 그는 그곳에 있는 그곳에 있는 [[나폴리]] 공주 카를로타와 접촉할 겸 새로운 동맹인 [[프랑스]]의 왕과 귀족, 고위 성직자들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. 체사레는 마르세유를 거쳐 [[프랑스]] 국왕 [[루이 12세]]가 있는 곳까지 도착해 왕과 사냥터에서 만나 이후 한동안 [[프랑스]]에 체류하게 된다. 그는 카를로타와는 결혼하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[[프랑스]] 상류사회에서 유명해졌으며 1499년 5월 [[루이 12세]]의 주선으로 [[프랑스]] 왕족이자 [[나바라 왕국|나바라]] 왕 [[호아네스 3세]]의 여동생인 샤를로트 달브레와 결혼하게 되었다.[* 이때 아버지인 [[알렉산데르 6세]]에게 '''자기 신혼 첫날밤을 상세히 기록한 편지를 보냈다'''.] 그는 2개월 동안 아내 샤를로트와 함께 있다가 그해 7월 [[루이 12세]]의 [[이탈리아]] 원정에 200기의 기병을 거느린 채 참전해 [[이탈리아]]로 돌아오게 된다. 1499년 10월 체사레는 [[프랑스군]]과 함께 [[밀라노]]로 입성했고, [[로마]]로 돌아와 [[교황령]]군 총사령관이 된 체사레는 1499년부터 1502년에 걸쳐 로마냐와 우르비노 등 수많은 지방을 정복해 로마냐 공국을 세워 통치하기 시작했고, 다른 [[이탈리아]]의 도시국가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. 그의 원정은 단번에 진행된 것이 아닌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첫 번째 정벌은 로마냐 지방으로 본래 [[교황령]]이었으나 아비뇽 유수를 계기로 지방 귀족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 도시들이었으며, 그 도시들을 발판으로 [[이탈리아]] 전토를 통일하는 것이 알렉산데르와 체사레의 목표였다.[* 당시 [[이탈리아]]에서는 [[샤를 8세]]의 이탈리아 침입 등 프랑스, 신성 로마 제국, 스페인 등이 [[이탈리아 전쟁|땅 따먹기]]를 벌이는 데에 여념이 없었는데, 이에 알렉산데르는 '''이탈리아 통일'''이야말로 땅 따먹기를 조속히 끝낼 수 있는 길이라고 보았고, 그것을 교황으로서의 최대 목표로 삼았던 것. 다만 여기에서 대단한 것은 '''교황령의 이탈리아 통일이 아니라 새로운 세속 국가의 이탈리아 통일'''이었다는 데에 있다. 즉, [[교황령]]은 오늘날의 [[바티칸 시국]]과 마찬가지로 세속의 권력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고 종교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겠다는 것인데, 교황령 천 년 역사상 이러한 생각을 한 교황은 [[알렉산데르 6세]]가 '''유일하다'''.][* 훗날 [[율리오 2세]]가 '''[[교황령]]의 이탈리아 통일'''을 교황으로서의 최대 목표로 삼은 일이 있다. 즉, "알렉산데르와 정 반대로 하겠다."는 것이었다. 그러나 [[이이제이]](以夷制夷) 전략으로 이탈리아 통일에 방해가 되는 국가를 차례로 약화시켰지만, 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다.] 그해 11월 그는 [[교황]] [[알렉산데르 6세]]에게 독이 묻힌 편지를 보낸 포를리와 이몰라의 백작부인인 [[카테리나 스포르차]]를 공격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보였다.[* 카테리나에게서 항복을 받아낸 후 체사레는 자신에게 온갖 막말을 퍼붓는 카테리나를 겁탈하는데, 이에 당시 체사레의 동맹이었던 프랑스인들은 기겁을 했으나 카테리나는 오히려 체사레를 향해 '''"니가 하도 괜찮게 생겨서 나도 언제 너 한번 따먹으려고 했다."'''라며 패기넘치게 말했다고 한다.] 1500년 2월 체사레는 일부 군사를 거느린 채 [[로마]]로 돌아왔다.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크레치아의 2번째 남편이었던 비셸리에 공작 알폰소가 갑작스럽게 암살되는 사태가 벌어졌고, 또 다시 모든 의혹이 그에게 집중되었다. 그해 8월에 그는 다시 군대를 몰고 내분 중인 시에나를 점령했고 그리고 여세를 몰아 [[교황]] [[알렉산데르 6세]]의 파문을 받은 리미니, 파엔차, 페사로를 쳤고, 수많은 용병부대 및 [[프랑스군]]으로 이루어진 12,000명을 이끌고 리미니로 진군, 리미니의 영주였던 판돌포 말라데스타는 체사레에게 항복한 후 서둘러 가족들과 함께 리미니에서 도망쳐 체사레의 교황군은 리미니에 무혈입성했다. 그의 2번째 목표는 여동생 [[루크레치아 보르자]]의 첫 남편이었던 조반니 스포르차가 있던 페사로였고, 조반니는 옛 처남이 기세등등하게 페사로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에 싸우지도 않고 페사로에서 도망쳐, 체사레는 또 다시 리미니처럼 무혈입성했다. 그해 11월 체사레와 그의 군대는 12세의 어린 영주인 아스토레 만프레디가 지배하는 파엔차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. 피엔차는 다른 두 도시와는 달리 끝까지 저항하다가 1501년 4월 영주인 아스토레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했고 아스토레 만프레디는 로마로 보내졌다.[* 이후 아스토레 만프레디는 다음 해인 1502년 1월 산타젤로 성에서 암살되었고 범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체사레로 추정되고 있다.] 뛰어난 군사적 능력만큼 유능한 통치자로서 단기간에 로마냐 공국을 [[베네치아]]나 [[밀라노]] 등에 맞설 만큼 키워냈으며, 자신이 고용한 용병대장들이 자신들도 결국 토사구팽되고 영지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자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가장 아끼던 심복 부하까지 죽여가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며 이들을 세니갈리아 성에 모아놓곤 단번에 [[숙청|집단 처형]]하는 무자비하고 냉혹한 면모를 과시했다.[* 마키아벨리는 [[군주론]]에서 세니갈리아에서의 [[숙청]]을 훌륭한 계획이었다고 평가했으며, 의사이자 성직자, 역사가이자 전기 작가였던 파올로 조비오(Paolo Giovio)도 '''"멋진 속임수"'''라고 긍정적으로 기술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